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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지정 문화재 조종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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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가평문화원
댓글 0건 조회 5,263회 작성일 16-05-25 16:35

본문

 

 종이라는 단어는 여러 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으나 그 하나는 동쪽으로 흐르는 물을 뜻하기도 한다. 조종이라는 어휘가 만들어진 중국의 입장에서 보자면 중국 서북부 고원에서 발원한 물줄기가 대부분 동쪽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가게 된다. 만 번을 꺽여 흐르더라도 결국에는 동쪽으로 면한 바다로 이르는 것이 중국의 자연지리적 특성이다. 우연히도 조종천은 동쪽으로 흘러 한강으로 흘러들어 결국 바다에 이른다. 조종의 또 다른 의미는 봉건시대 제후가 천자를 받드는 의미와 같은 신분적, 계층적 질서도 갖게 되는데, 특히 조선시대 임진왜란 병자호란과 같은 외세의 침입과 국란을 겪으며 척왜, 친명, 배청의 시대상들이 조종(암)이라는 지명과 관련하여 쉽게 결합, 전이되고 심화된 경우라 할 수 있다. 반외세적인 이러한 정서는 일제 침략기까지 이어져 왔는데 많은 의병활동가(특히 화서학파)들이 조종암을 방문하거나 또는 이곳과 관련하고 있는 점이 그러하다.
 바위에는 조선 숙종 10년(1684) 임진왜란 때 명나라가 베풀어준 은혜와 병자호란 때 청나라로부터 당한 굴욕을 잊지 말자는 뜻의 여러 글귀를 가평군수 이제두와 허격, 백해명 등이 새겨 놓았다. 즉, 명나라 마지막 황제 의종의 글씨 ‘사무사(思無邪: 생각에 사특함이 없음)’, 조선 선조의 글씨 ‘만절필동 재조번방(萬折必東 再造蕃邦: 일만 번 꺾여도 반듯이 동쪽으로 흐르거니 명나라 군대가 왜적을 물리치고 우리나라를 다시 찾아 주었네)’, 송시열이 쓴 효종의 글귀 ‘일모도원 지통재심(日暮道遠 至痛在心: 해는 저물고 갈 길은 먼데 지극한 아픔이 마음속에 있네)’, 낭선군 이우가 쓴 ‘조종암(朝宗巖 : 임금을 뵈이는 바위)’이란 글귀 등이 적혀 있다.
 순조 4년(1804)에는 이러한 유래를 적은 비를 암벽 앞에 세웠는데 , 비문은 조진관이 짓고 김달순이 썼다. 또한 순조 31년(1831)에는 명나라 9의사(병자호란 때 청에 잡혀간 봉림대군과 합심하여 인조 23년 대군이 귀국할 때 우리나라로 망명했던 명나라 사람들)의 후손이 이곳에 와서 지방 유림들과 함께 대통행묘(大統行廟)와 구의행사(九義行祠)를 세워 명나라 태조와 9의사를 위한 제사를 지내었다.
 조종면 조종천 변 조종암을 통하여 조선시대 당시 명나라를 숭상하고 청나라를 배척했던 소위 숭명배청(崇明排淸)의 사상에 한 단면을 잘 보여주는 유적이라 할 수 있다. 매년 3월 19일(의종황제 휘일) 배례를 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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