읍내리 가평읍의 연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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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평읍의 연혁
가평(嘉平 또는 加平)이라는 소지명은 이미 신라시대(景德王 16년 서기 757년)부터 붙여진 이름이다.
북한강을 사이에 두고 강원도 춘천시와 인접해 있고 춘천시로 통하는 관문이기도 하다.
군청 소재지이자 가평군의 행정 중심지로서 향교(鄕校)와 경찰서·교육청·농협등의 기관이 모두 가평읍에 소재한다.
읍내에서 북으로는 옥녀봉(玉女峰)이 있고, 동편에 명산 보납산(寶納山)이 수천년의 역사를 지켜보며 유유히 흐르는 북한강가에 서있다.
대곡리 앞 들판을 옛날에는 화성(花城) 뜰이라고 불렀으며, 이 들판에서 차전놀이와 횃불싸움 등의 민속이 행해졌다고 기록되어 있으나 지금은 그 흔적을 찾을 길이 없다.
달전리에서 강옆 길을 따라 읍내까지 이르는 길을 만리성(萬里城)이라고도 불렀으나 지금은 물에 잠겨 버렸다.
비선거리(일명비석거리:대곡리 소재)에는 가평의 역사적 자취를 말해 주는 크고 작은 비석들이 30여 개나 있었지만 6.25전란 중 도로에 묻혀 버렸고, 환관(宦官) 성순조(成順祖)의 옛 집터는 주추만 남아있다.
서기 1871년 고종8년 辛未年에 제작된 가평읍지(加平邑誌)에 의하면 현재의 가평읍은 邑의 14개 洞, 즉 中村·客舍村·鄕廳村·垈谷里와 郡內面에 속해있던 5개 동,즉 達田里·開谷里·上馬場里·下馬場里·升安山 부락. 그리고 南面에 속해 있던 梨花洞·秘靈垈·上金垈·下金垈·柳洞·福長浦·鶴翼洞·山踰洞 등 8개 洞과 內西面에 속해있던 上三儀谷·下三儀谷·上色峴·軟葛里·中色峴·下色峴 등 6개 洞으로 面과 里가 구분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후 1896년(高宗 33년·建陽元年) 8월 정부의 관제개혁으로 邑中부락과 內西面을 통폐합하여 郡內面이라 이름 붙였으며 관할 동리는 읍내리·대곡리·달전리·하색리·상색리·두밀리·경반리·마장리·승안리·개곡리 등 10개 리였다.
또 다시 1942년 일제치하에서 청평의 수력발전소가 완공되어 북한강 일대의 광활한 농경지가 수몰되자 남면 6개 리 중에서 이화리·산유리·복장리·금대리를 군내면에 편입시키고, 고성리와 호명리는 외서면으로 개편 편입시켰으며 이때부터 남면은 완전 폐지되어 현재에 이른다.
명현으로는 함안이씨의 시조인 이방실 장군의 묘소가 하색리 능골에 있으며, 그 인근에 이조시대 야담가로 유명했던 어우당 유몽인의 산소도 있고 인평 부원군 이보혁과 영의정을 지낸 이재협이 대곡리 역 뒤에 잠들어 있다.
성종과 연산군이 가평에 내려와 온수로 목욕을 하고 피부병을 고쳤다는 온천이 있었다고 하나 지금은 찾을 길이 없고 다만 그곳을 찾고자 하는 술객들의 왕래가 있을 따름이다.
승안리에 소재한 용추폭포는 천년의 신비를 간직한 채 쏟아져 내리며, 가평관좌에서 청룡의 맥을 이어주는 보납산은 천하명산임을 대변하고, 명필 한석봉이 우산(늪산)에 올라 풍월을 읖조린 시와 친필은 지금도 그때의 정경을 잘 회상시켜 준다.
북한강 절벽 위에 깍아 세운 듯한 초연대에서 화성뜰에 피어나는 격양가를 듣고, 발아래 놓여있는 강물 위 어부들의 어부사를 듣는다면 정녕 천하의 명승지가 아니겠나 생각된다.
1932년 군내면이 가평면으로 개편되고, 1973년 7월 가평면은 읍으로 승격되었다.
현재의 가평읍은 14개의 법정리와 31개의 행정리가 있고 33개의 자연부락으로 구성되어 총면적 145.81㎢ 위에 주민 19,579명이 거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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