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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곡리 ♡ 중촌(中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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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가평문화원
댓글 0건 조회 6,338회 작성일 15-06-14 21: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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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촌(中村)

설곡리의 중심마을로 마을회관과 설곡교회가 있다. 미원초등학교 설곡분교가 이 곳 묵안리로 넘는 고갯길 우측에 자리잡고 있으나, 폐교되어 건물만이 덩그렇게 남아 있으며, 묵안, 왕방골, 성곡으로 가는 갈림길이다.

1368년 공민왕의 국사(國師) 보우(普愚)스님이 이곳에 소설사란 절을 짓고, 생전에 못다 한 부모님께 효성을 드리기 위해 불공으로 은공을 대신했다는 이야기는 불가의 효행으로 손꼽히고 있으니, 지극한 효자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불교 임제종(臨濟宗)의 시조로서 유명한 보우(普愚)스님은, 1301년(고려 충열왕 27) 이 곳 설곡리에서 홍연(洪延)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어려서부터 인자하고 총명하였으며, 글을 좋아하여 이웃의 칭송을 받았다.

13세 때 출가하여 회암사에 들어가 중이 되고, 24세에 승과(僧科)에 급제하였으나, 영욕을 버리고, 용문산 상원암(上院庵)에 들어갔다가, 다시 서울 삼각산에 절을 창건하고, 태고사(太古寺)라 하였다. 45세 때 중국에 가서 청공(淸珙)의 법을 이어받아 임제종의 시조가 되었다. 47세 때 설악면 설곡리에 들어와 소설암(小雪庵)을 짓고, 속세의 부모님께 못다 한 효성을 불공으로 대신하며 도를 닦았으나, 고려 공민왕(恭愍王)이 그를 왕사(王師)로 받들어 개성 광명사에 들어갔다.

그러나 당시 국사(國師)로 있던 신돈(辛旽)이 국정을 다스림에 횡포와 부패가 심하여, 그를 미워한 나머지 왕사도 사직하고 다시 소설암으로 돌아오게 된다.

1371년(고려 공민왕) 신돈이 부정부패로 신임을 잃고, 끝내 수원에서 참형되자, 공민왕은 보우 스님을 국사(國師)로 모시기 위해 설곡리 소설암을 직접 찾아와 국사로 책봉하기에 이른다. 이로 인하여 설악면은 당시 미원장(迷源莊)이었는데, 미원현(迷源縣)으로 승격되었다.

1374년 우왕(禑王)이 즉위하자, 국사를 사퇴하고 영원사(塋源寺)에 머물다가, 다시 소설암으로 들어와 1382년(우왕 8)에 열반하였다. (가평의 자연과 역사 p244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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