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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천리 설악면의 연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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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가평문화원
댓글 0건 조회 7,099회 작성일 15-06-13 1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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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악면의 연혁

 설악면은 옛 부터 이르기를 문향(文鄕)이라고 한다. 그것은 다른 지역보다 문화유산이 잘 계승되어 있고, 또 당대의 뛰어난 인물이 계속 배출되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일 것이다.

설악면은 이미 고구려시대부터 미원(迷源)이라는 이름으로 불리어 왔다. 고구려 당시에는 항양(恒陽·양근군의 이름) 이라는 고을의 감무(監務)를 받아왔고, 신라시대에는 빈양(濱陽·영화(永化)·또는 익화군(益化郡)에 예속되어 있었다.

이 익화군이 미원현의 옛 군명(郡名)이라는 설도 있으나 현재까지 이를 뒷받침 할만한 자료는 없는 실정이다.

미원현(설악면)은 고려 공민왕 5년 서기 1356년에 당시 국사승(國師僧)으로 있던 보우(普愚) 스님이 이 고을의 소설암(小雪庵 : 설곡리 소재)에서 수년간 우거(寓居)하고 있던 고을이라 하여 장(莊; 현보다 아래인 고을이름)을 현(縣)으로 승격시켜, 감무(監務)를 설치하였으나 면적과 인구가 적어 얼마 후 다시 양근군 북면으로 편입되었다. 그 후 1896년 8월 관제개혁으로 양근군과 지평군이 통폐합되어 양평군으로 개편되면서 양평군 상하도면(上下道面)으로 분리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1942년 청평 수력발전소가 준공되면서, 다시 행정적 편의와 가평군 남면의 광활한 옥토가 물에 잠겨버리자, 남면을 폐지시켜, 일부는 가평면에, 일부는 외서면에 이관 시켰으며, 이때부터 설악면이 가평군으로 편입되어, 가평군의 중요한 문향으로서 또는 곡창지역으로서의 역할을 다하고 있다.

문화유산으로는 미원서원이 모체가 된 경현단(景賢壇)이 선촌리 장돌부락에 현존하며, 정감록(鄭鑑錄)에도 나타나 있듯이, 양근에서 치북 40리(致北四十里) 지역에 있는 소설(小雪 : 지금의 설곡리)부락은 전국 10승지지(十勝之地 : 열 개안에 드는 명승지) 중에 한 곳이라는 것만 보아도 살기 좋은 무릉도원(武陵桃園)의 고을임에 틀림없다. 1895년 을미의병 당시에는 이 지역 인사로서, 이범구·김춘수·이관구·정지산 등의 의병장이 나라를 위해 몸바쳐 싸웠고, 1919년 독립만세운동 때는 가평의 만세 운동을 주도하신 이규봉(李圭鳳) 선생의 출생지가 설악면 위곡리 도곡 부락이기도 하다.

창의리 정도사 고가 (鄭都事 古家)는 광해군 14년 임술년(1622년)에 세웠다는 상량문이 있고, 방일리 의령 남씨 별묘(別廟)에는 오늘도 남함 선생의 영정이 설악의 흘러가는 자취를 지켜주고 있다.

선촌리에는 신선들이 이따금 내려온다는 울업산 신선봉(神仙峰)이 있어서, 지금도 꽃피고 안개 낀 날이면, 신선들의 노니는 모습이 가물거릴 듯, 사뭇 서기가 맴도는 듯 하다.

북으로는, 북한강·홍천강이 인접해 있고, 동으로는 봉래산이 있으며, 재를 넘으면 홍천군 모곡이 나오고, 남쪽으로는 용문산이 양평군과의 경계를 이루고, 이 산 계곡에서 흘러내리는 맑은 물이 유명산 계곡을 이루어, 사계절의 경운(景韻)이 너무도 아름답다.

1973년 7월 양평군 서종면 영천과 이천 두 자연부락이 이천리(梨泉里)로 통합되어 설악면으로 편입되었다.

현재 설악면에는 법정 리수가 15개리 이고, 행정수는 29개리이며, 38개의 자연부락으로 구성되었으며, 총면적 141.42㎢에 총인구가 6461명이 거주한다.

교육기관으로는 미원초등학교와 방일초등학교가 있고, 설악초등학교와 엄소분교는 폐교되었고, 위곡과 장락초등학교는 미원초등학교의 분교로 개편 운영되고 있으며, 중등교육기관으로는 설악 중·고등학교가 있다.

의료기관으로는 병·의원 4개소에 보건지소 1개소가 주민들의

 진료를 담당한다.

교통망은 면소재지인 신천리를 중심으로 4통 8달로 국도 및 지방도로가 면내 각 마을을 연결하고 있다. 46번 경춘국도에서 갈라지는 청평 신대교로 진입하면 회곡리, 신천리로, 다시 남쪽으로, 엄소리·천안리·방일리·가일리로 통하는 37번 국도가 유명산 농(籠) 다치 고개(서너치<3∼4寸> 고개)을 넘어 양평군과 연결되고, 이 지역을 남북으로 이어주는 대동맥이 되어 있다.

면소제지인 신천리에서 동남방으로 위곡리를 거쳐 설곡리·묵안리를 연결하는 지방도, 동쪽으로 위곡리를 거쳐 널미재 고개를 넘어, 강원도 홍천군 모곡으로 연결되는 86호 국가지원지방도, 동북방으로는 선촌리 울업 고개를 돌아 송산리에서 소리고개·옥고개를 넘어 미사리(메수내)까지 연결되는 군도 4호선 도로가, 그 중추적인 교통의 수단이 되어 있다. 신촌리에서 서남쪽으로 설고개를 넘어 이천리를 잇는 지방도도 있다.

신천리에 소재한 망두산에는 조선조 太宗大王의 5대 손인 李剛伯의 묘가 있으나, 종중에서 실전(失傳) 되었는지 문관석과 비석이 동강난 채 누워있고, 한양부 고개(일명 울업고개) 능선에는 이름 모를 어느 양반 네 산소에 잡초만이 무성한 채 문관석(文官石)이 외롭게 서 있다.

방일리 의령 남씨 別廟 앞에는 500여 년의 역사를 말해주는 느티나무(지방기념물)가 동리의 수호수(守護樹)가 되어 있고, 그곳에서 100여m 정도 떨어진 바위에, 대명산천(大明山川)이란 글자를 새겨 놓았는데 이 글씨를 새긴 후로는 호랑이의 재난이 끊어졌다는 전설도 있다.

그곳에서 동남쪽으로 묵안리를 향해 가다보면 물을 막아 주었다해서 장수암(障水岩)이라 부르는 바위가 지금도 길가는 나그네들의 발길을 멈추게 하며, 암반에 새겨놓는 묵암동천 삼청일월「墨岩洞天 三淸日月」이란 글씨가 이를 잘 대변해 준다.

묵암동(墨岩洞)이 와전해서 지금은 묵안리(墨安里)라고 부른다는 이 마을 뒷골, 종자리라는 곳에는 6 ∼7백년이나 묵은 노송이 있는데, 호령 소나무라 부르며, 이 소나무 밑에서 호랑이가 물고 간 남편의 시체를 찾아다 장사지낸 부인을 위하여 3년간이나 모든 농사일을 호랑이가 대신하여 주었다는 전설도 있다.

설곡리 구정벼루라는 계곡 가에는 구대 정승(九代政丞)의 아들을 둔다는 묘(墓) 자리가 있다고 하여, 지금도 이를 찾아 수 많는 풍수객(風水客)이 몰려들고 있으니, 과연 그 명당(明堂)자리는 어느 곳에 있는지 궁금증을 자아내게 한다.

위곡리 위곡분교 아래 삼거리에는 100여 년 전에 세운 것으로 보이는 심의홍(沈宜弘) 군수의 영세불망(永世不忘) 비석이 있고, 그곳에서 남서쪽 능선 가에는 3층으로 된 고인돌이 이 마을의 옛 자취를 정감 나게 하여 준다.

이곳 저곳에 서 있는 옛 어른들의 사적을 기록한 신도비(神道碑)는 오랜 풍우한설(風雨寒雪)을 말해주고 있으며, 구한말 화서 이항로(華西 李恒老)선생의 학통(學統)을 이어받은 운담 최예준(雲潭 崔禮璿) 선생의 추모비가 미사리 운담부락 길가에 세워져 있다.

설악에서 물물교환 시장으로 유명했던 선촌리 울업 장거리는 청평댐을 막은 후, 그 자취를 잃은 채 흔적이 없고, 울업산을 끼고 흐르는 북한강 맑은 물만이 지금도 유유히 흘러가고 있다.

 (가평군지 및 가평군 향토지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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