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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촌리 ♡ 경현단(景賢壇 : 가평군 향토문화재 제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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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가평문화원
댓글 0건 조회 6,590회 작성일 15-06-13 1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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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현단(景賢壇 : 가평군 향토문화재 제3호)

장석동에는 경현단(景賢壇)이 있다. 1661년(현종2년) 지방유림들이 조광조(趙光祖)와 김식(金湜)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하여 창건하였다. 그 후 1668년에 김제(金湜)을, 1694년에는 남언경(南彦經)을, 1734년에는 이제신(李濟臣)을, 1792년에는 김창옹(金昌翁)을 각각 추가로 배향(配享)하였다. 1694년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폐철되면서 위패는 서원터에 묻었다. 1919년 지방유림에 의해 단(壇)이 설치되어 향축(享祀)하여 오다가 6. 25전쟁으로 퇴락한 것을 1974년 중수·개축하고, 박세호(朴世豪)·이원충·남도진·이항로·김평묵·유중교를 추가로 배향하였다. 그리고 단비(壇碑)를 세우고, 서원 사우(祠宇)의 현액(懸額)이 경현사(景賢祠)였으므로, 단(壇)의 명칭을 경현단(景賢壇)이라고 하였다. 경현단에는 12인의 신위가 봉안되어 있는데, 중앙에는 정암(靜菴) 조광조(趙光祖)와 정우당(淨友堂) 김식(金湜)의 신위비(神位碑)가 모셔져 있고, 좌측에는 동강(東岡) 남언경(南彦經), 잠곡(潛谷) 김육(金堉), 용담(龍潭) 박세호(朴世豪), 농환제(弄丸薺) 남도진(南道振), 중암(重菴) 김평묵(金平默)의 신위비(神位碑)가, 우측에는 청강(淸江) 이제신(李薺臣), 삼연(三淵) 김창옹(金昌翁), 잠옹(潛翁) 이원충(李元忠), 화서(華西) 이항노(李恒老), 성제(省薺) 유중교(柳重敎)의 신위비(神位碑)가 모셔 있다.

신위비를 담장으로 둘러쌓았고, 단칸 문이 남아 있다. 문(門) 위에는 미원서원(迷源書院)이라고 쓴 현판과, 1974년 경현단을 보수할 때, 찬조(贊助)한 사람들의 명단을 적은 현판이 걸려 있다. 문화유적총람(「文化遺蹟總覽」)에는「이 서원(書院)은 정면(正面) 1간(間)위 단층 맛 배 지붕이다.」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12인의 위패를 모신 사당이 단칸이라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 것 같다. 문화유적총람(文化遺蹟總覽)이 만들어질 당시인 1970년대에는 사당이 있지도 않았으니, 아마 서원철폐 전에 단칸 건물에 위패만 모셨을 것이라고 추측하여 기록하였거나 혹은, 현재 남아 있는 문을 그렇게 표현한 것으로 생각된다.

신위비(神位碑)는 비신이 가로 18.5cm, 높이 45.5cm, 두께 11cm정도이다. 매년 중추절(仲秋節 : 음력 8월) 중정일(中丁日 : 두 번째 丁日)에, 이 고장 유림들이 행정기관의 후원을 받아, 그 분들의 학덕(學德)을 흠모하는 제향을 드리고 있다.

1751년(英祖 27)에 저술한 이중환(李重煥)의 택리지(擇里志)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보인다.


 "양근의 용문산 북쪽에 있는 미원촌(迷源村; 설악면의 옛 이름)은 옛날 정암 조광조(靜庵 趙光祖)가 이곳 산수를 사랑하여 터를 잡아 살고자 하던 곳이며, 나도 한번 가 보았다. 산 속이 비록 조금은 넓으나 지대가 깊이 막혔다. 기후도 또한 싸늘하고, 사방의 산도 아담하지 못한데, 앞 시냇물이 너무 목 메인 듯한 소리를 내니 낙토(樂土)는 아닌 듯하다".


楊根龍門山北有迷源村 昔靜庵趙光祖 愛山水

 欲卜居 余嘗見之矣 山中雖小灰拓地旣深阻

 氣亦凄寒 四山不雅 前溪太咽 非樂土也


이 부락에는 이조참판 전의이씨(全義李氏) 이문회(李文會)의 묘와 신도비, 그리고 이조판서 이근필(李根弼)의 묘도 있어 유서 깊은 고장임을 나타내고 있다.

현재 이곳 장들 마을에는 38가구가 살고 있으며, 주로 농업에 종사하고, 마을로는 탐선 마을에서 진입할 수도 있고, 신천1리와 선촌1리에서도 찾아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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