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곡리 ♡ 성골(城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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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골(城谷)
양지말과 근접된 부락으로, 산이 마치 성처럼 둘러 쌓여 있어서, 매우 아늑하고 조용한 마을로 정감록에 기록된 피화지지(避禍之地: 피란처) 또는 십승지지(十勝之地: 열 개안에 드는 명승지)로 "楊根致北四十里有小雪<양근 북쪽 약 40리에 소설이 있다>"이라는 기록이 이 부락을 지칭한 것이라고 한다.
성골에는 곰이 살았다는 "곰굴"이라는 자연동굴이 있는데, 입구는 겨우 사람하나 기어 들어갈 크기이지만, 안은 매우 넓다고 한다. 임진왜란, 병자호란 때 주민들이 이곳에 들어가 숨어 피난을 하였다 하나, 아직까지 끝까지 들어가 조사하여 본 사람이 없다고 한다.
그리고 옛날 대마초를 대량 재배하던 "삼밭골" 계곡을 따라 오르면, 강원도 홍천군과 경계를 하고 있는 "가락재" 고개가 나온다. 8. 15이전 사회적으로 크게 물의를 일으켰던 백백교가 이곳에도 있었는데, 그 당시 목조 초가 2채가 그들의 은거지로 사용되었고, 자체적으로는 농사를 지어 생계를 이었다고 한다. 경작농지가 약 만 여 평이나 되었다고 한다. 산 중턱에 만 여 평의 농경지를 개간할만한 광활한 지형이 있으니, 이를 두고 가락지처럼 생긴 고원 분지로 들어가는 고개라는 뜻은 없었는지 궁금하다.
북면 적목리 조무락골(가평의 지명과 유래 상권 p262 참조)의 소개에 있듯이, 안에서 이루어지는 일을 외부에서는 전혀 알지 못하였으며, 그곳에 들어간 사람은 재산과 자유를 완전 박탈당했으며, 끝내는 피살되었다 한다. 일부 주민들에 의하면 백백교가 망한 뒤, 백백교의 간부를 생포하여, 그의 자백과 안내로 매장된 시체 30여구를 찾아 공동묘지에 이장하였다는 목격자의 진술한 기록이 있다고 한다.
이 곳 성곡마을에는 약 20여호가 살고 있는데, 그 중 11세대가 갈씨가 거주하고 있으며, 옛날에는 타성이 없는 갈씨의 집성촌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대중교통수단으로는 시내 버스가 4회 왕복하는 종점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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