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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일리 ♡ 윗가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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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가평문화원
댓글 0건 조회 6,260회 작성일 15-06-14 2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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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윗가정

 유명산 휴양림 주차장이 있는 곳으로, 유명농계(有明弄溪)를 따라 자연경관이 수려하고, 계곡의 물소리마저 정겹다. 한마디로 검고 흰 바위와, 소나무, 잡목들이 어우러져서 별유천지를 실감케 한다.

중미산과 소구니산 중간에 뚫려 있는 37번 국도가 큰 고개를 이루며 구비굽 돌아 양평으로 이어 지는데, 고개가 하도 높아서 서너치(三·四寸)만 더 오르면 하늘과 맞닿는다는 "서너치"(三四寸)고개가 있다. 또 하늘에 가까워서 신선들이 사는 고개라는 뜻의 선어치(仙於峙)가 와전되어, 서너치가 되었다는 설도 있다. 지금은 37번 국도가 4차선으로 훤하게 뚫어 있다.

이 서너치 고개는 양평쪽 "농다치"고개로 이어지는데, 고개 너비가 3∼4치(寸) 정도도 안 되는 좁은 고개라는 뜻으로, 1촌<一寸 : 약 3cm>을 한 치라고 하니, "서너치"란 삼사촌(三四寸: 약 9∼12cm)을 가리키는 말로, 고개 길의 너비가 세 치(寸) 내지 네 치(寸)가 될까 말까 할 정도로 좁다는 뜻 또는 서너치(三四寸)만 넓으면 좋을 터인데 하는 소망을 담은 고개"라고 한다. "농다치"란, 시집가는 신부의 농을 지고 고개를 넘어가면, 아무리 조심하여도 산모퉁이에 부딪치어 농이 다쳤다고 하여 "농 다치" 고개라고도 하였다니 "서너치"고개나 "농다치"고개가 모두 좁은 것은 물론, 이 고개를 사이에 두고 많은 선남선녀가 부부의 인연을 맺고 신접살림 가구를 지고 오고 간 것을 짐작하게 한다.

6·25 동란 중, 중공군의 춘계공격을 분쇄한 용문산 전투도 사실은 중공군은 이 고개를 넘어 남한강으로 진출하려는 군사목적이 있었고, 국군 제 6사단 장병들은 용문산을 사수하여 북한강과 남한강을 제압할 수 있는 군사적 요충지를 확보하고, 중공군의 전반적인 전략을 무력화시키는 빛나는 전과를 올렸으니, 이 고개가 얼마나 유서 깊은 고개인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중미산 중턱에는 지금도 곰의 발자국이 있다는 소문이 있으며, 구석기 시대 공용이나 그와 같은 동물이 살았었다는 "곰지기골"이 있으며, 또 유명산 입구에 있는 "입구지"(入口池) 계곡이라는 소(沼)가 있다. "입구지"는 "익고지"(益高池)라고도 했으며, 가뭄이 계속될 때 기우제를 지낸 후, 개의 머리를 계곡 상류에 있는 용소(龍沼)에 넣으면 비가 온다고 하였다 한다. 또한 폭포소 중간 바위틈에 박쥐가 많이 서식하고 있다는 "박쥐소", 계곡이 넓고 바위도 넓적하다는 "마당소"와, 유명산 정상부근에 바위 세 개가 우애 좋게 나란히 자리하고 있다는 "삼 형제" 바위가 있으며, 그 아래 최씨가 살았다는 피나무골과 배씨가 살았다는 배나무골, 또한 유명산 계곡에 있다.

이 곳 윗가정에는 창건한지 약 30년 정도 되는 광법사가 있고, 10여 가구가 현재 거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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