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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일리 ♡ 음방(陰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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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가평문화원
댓글 0건 조회 6,217회 작성일 15-06-14 2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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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음방(陰訪)

먼 옛날부터 방일리에서 제일 큰 마을이라 큰말이라고 하다가, 그 후 양방에 대치되는 음지쪽 방향에 위치하고 있다 하여 음방이라 부르고 있다. 같은 마을이지만 율리(밤자골)를 지나 음방에 다다르면, 수 백년이나 된 느티나무가 도로변에 있어, 양평과 유명산을 찾은 길손들이 잠시 쉬어 가는 휴식처와 이정표가 되고 있다. 또 의령 남씨의 별묘(別廟)가 이곳에 있다. 별묘는 농환재(弄丸齋), 남도진(南道振)의 사당이다. 그의 자는 중옥(仲玉), 호는 농환재(弄丸齊), 환재옹(丸齋翁), 낙은 암주인(樂隱 岩主人)등이며, 어려서부터 문재(文才)가 뛰어나 세인들이 신동이라 불렀다.

현재 별묘의 사당에 모셔 있는 그의 영정은 1728년 당시 유명한 화상(畵像) 함세휘(咸世煇)가 그린 것으로 지금도 원형대로 보존되어 있다.

농환재 남도진은 1674년(顯宗 15년) 10월 1일, 남택하(南宅夏)의 둘째 아들로 태어나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재주가 있었으며, 학문을 좋아하고 경서(經書) 읽기를 즐겨했으므로 세인이 기동(奇童)이라 하고, 그의 인품이 늠름하고 범상(凡常)하여 반드시 훌륭한 재보(宰輔)가 되리라 칭송하였다. 소년시절 그는 당대의 대유(大儒)였던 권상하(權尙夏)의 문하에 들어가 공부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으나, 훌륭한 고관 대작의 문벌에 의지하여 헛된 이름을 얻는 것을 원치 않는다고 주장한 말을 미루어 볼 때 그의 고결한 학문의 자세를 엿보게 한다. 1697년(肅宗 23) 24세시에 당시 고성군수(高城郡守)로 있던 아버지를 따라 금강산을 유람하고 돌아와, 봉래가(?萊歌)와 유산록(遊山錄)을 지었다. 1714년(肅宗 40) 41세 되던 해 아버지의 명에 의하여 갑오 증광문과(甲午 增廣文科)에 응시하였으나, 그는 시권(試卷)을 빨리 써 가지고 나와 이내 불살라 버리는 등, 관로(官路)에 나가는데 뜻을 두지 않은 흔적이 보인다. 그는 속세를 통달한 은인(隱人)으로서, 영욕(榮辱)의 와중에서 벗어나, 낙천지명(樂天知命)의 분수대로, 평범한 선비의 행색으로 산천(山川)을 왕래하며, 수석(水石)과 벗을 삼고, 이곳 낙은암 계곡을 배회하며 깊은 시상(詩想)에 잠긴 모습에서, 그의 천품과 은거의 실상을 대강은 알 듯도 하다.

농환재 남도진은, 낙은암 계곡에 빼어난 절경을 두루 완상(玩賞)하며, 그 가운데서 팔경(八景)을 이름짓고, 일곡팔경(逸谷八景), 또는 팔절탄(八節灘)이란 이름으로 경치마다 시를 지어 찬탄한 바 있고, 1722년(景宗 2), 이곳 낙은암 계곡을 배회하며 지은 낙은별곡(樂隱別曲)은 너무도 유명하다.


낙은별곡


 한사한 造化翁이 山川을 빚어낼 때

樂隱岩 깊은 골을 날 위하여 생겼으니

峰巒 秀拔하고 泉石도 奇特하다.

어화 主人翁이 名利에 뜻이 없어

鹿世를 下直하고 岩穴에 깃들이니

 내 生涯 淡白한들 분이라 관계하랴

弄丸齋 맑은 窓에 義易을 點檢하니

消長進退는 聖訓이 밝아있고

樂天知命은 警戒도 깊었어라

圓丸을 희롱하고 말 잊고 앉았으니

天根月窟에 몇 번이나 往來한고

長琴을 빗겨 안아 膝上에 놓아두고

平羽調 한소리를 步虛詞에 섞어 타며

 긴歌詞 자른 노래 느즉이 불러낼 제

悠然히 興이나니 世念이 전혀 없다.

南村에 늙은 벗님 北隣에 젊은 類들

松壇에 섞여 앉아 차례 없이 술을 부어

 두 세잔 거후르고 무삼 말씀 하옵나미

 앞 논에 벼 좋았고 뒷 내에 고기 많다.

春山에 비온 후에 徹徹도 살 젓다네

閑中에 이런 말씀 消日이 足하거든

紛紛한 閑是非야 귀결인들 들릴 소냐

海棠花 깊은 골에 낚 대 메고 내려가며

漁父詞한 曲調를 바람결에 흘려 불어

牛背의 短笛聲을 넌즈시 和答하니

夕陽芳草길이 걸음마다 더디어라.

東風이 건 듯 불어 細雨를 봐아오니

蓑衣를 이미 차고 石磯에 앉은 말씀

龍眼을 불러내어 이 形像 그리고자

榮辱이 不關하니 世事를 내 알더냐

酒肉에 잠긴 富貴를 자랑 마오

 여름날 더운 길에 紅塵間에 奔走하며

 겨울밤 추운 새벽 待漏院의 주춤이니

 자내는 좋다하나 나 보매는 괴로워라

 어저 내 身世를 내 이르니 자네 듣소

三伏이 熱하거든 白羽扇 높이 들고

風影에 지대 누워 긴 다리 펴이지니

安閑한 이 擧動을 뉘라서 말 할소냐

冬至밤 눈온 후에 더운 방에 이불 덮고

木枕을 도두기에 해 돗도록 잠을 자니

便함도 便할시고 잇분이 이실소냐

三公이 貴타하나 나는 아니 바꾸리라

 값을 쳐 비기랴면 萬金인들 당 할 손가

 보리밥 맛들이니 八珍味를 부러하며

 헌 배옷 맞고 자니 綺紈하여 무엇 할고

身世야 閑假할사 景物도 肅새하다.

鹿門山 밝은 달에 烟樹조차 열렸으니

德公 맑은 절개 뫼는 높고 물은 길어

栗里에 높은 바람 巢由山을 불러 넘어

樂天堂 베개 위에 이내 꿈을 맑히는고

天馬峰 莊한 形勢 雲空에 닿았으니

蒼天이 돌아갈 새 몇 집을 갈았는고

千萬歲 지나도록 나줄 줄을 모르나니

中山에 아침안개 半壁에 젖어있고

?嶺의 저문 구름 短에 빗겼어라

龍門山 그림자를 八節灘에 잠갔으니

入峽에 내린 물이 臥龍湫 되었어라.

波心을 平히 다려 萬斛水를 담았으니

老龍의 서린 자취 屈曲이 되어 있다.

風雲을 언제 쫓아 窟宅을 옮아간고

玉流포 노한 물 발 돌을 박차 내려가니

合浦에 明月珠를 玉盤에 구을린 듯

銀鉤의 水晶簾을 晝爛에 걸었는 듯

 티끌묻은 긴 갓끈을 濯纓湖에 씻어내니

 귀씻던 네 한 아비 자내 혼자 높을 소냐

盤谷川 긴긴 구비 草堂을 들렀으니

洋洋한 저 淸流야 ?塵으로 가지 말아

 연사에 막대 짚어 武陵溪 내려가니

兩岸에 나는 桃花 붉은 안개 자잤어라.

물위에 떠 논 꽃을 손으로 건진 뜻은

春光을 漏泄하여 世間에 던질세라

丹丘를 넘어들어 紫烟瀨를 지나가니

香爐峰 남은 뫼에 날 빛이 배어있네

邱별潭 고인 물이 水鏡이 맑았어라.

忘機한 저 白鳩야 너와 내가 벗이 되어

烟洲에 노닐면서 世上을 잊자고야

靑鶴洞 좁은 길로 仙釜淵 찾아가니

盤古氏적 생긴 가마 製作도 工巧하다.

衡山에 지은 솥틀 뉘라서 옮겨 온고

石澗에 달린 瀑布 上下淵에 내려지니

 갱然한 霹靂聲이 白日에 들리는고

溪山에 醉한 興이 해지는 줄 잊었으니

雙溪庵 먼 북소리 갈 길을 배았어라.

蘭沼에 봄을 주어 柳郊로 돌아드니

西山에 효한 氣運 四宜堂에 連하였네

 어화 우리 伯氏 宦情이 전혀 여려

功名을 謝禮하고 三足로 돌아드니

禍水에 남은 물결 몸 가에 미칠 소냐

長枕을 높이 베고 兩衰翁이 갈아 누어

膝下에 모든 子姪 차례로 벌었으니

 먹으나 못 먹으나 이 아니 즐거우냐

 아마도 水石이 逍遙하여 남은 해를 미치리라.

 (가평의 자연과 역사 p36 ∼ p40 참조)


그리고 별묘에서 가일리 쪽으로 조금 가다보면 바위에 대명산천(大明山川)이라 새긴 암각서(岩刻書)가 있는데, 도로 개통으로 그 대부분이 파손되었지만, 이 일대의 바위를 일컬어 낙은암(樂隱岩)이라 한다. 일설에 의하면 이곳에 호랑이가 자주 나타나, 사람들을 해치기 때문에 이를 근심한 농환재가 중미산(仲美山)에 제사를 올리고 낙은암에 대명산천이라는 암각서를 새긴 후로는 맹수의 피해를 입지 않았다 한다.

그 외, 농환재 남도진의 5대손인 남정철(南廷哲)에 관한 내용은 "가평의 자연과 역사 259p"를 참조하기 바라고 여기서는 줄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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